[국제시장]
요즘 한국만이 아니라 이곳 미국에서도 영화 "국제시장"의 열기가 대단하다. 이곳 저곳 한인들이 모이는 곳이면 회자되는 이야기가 국제시장이다.
나는 한국 전쟁이 터졌을 때 겨우 중학교 2학년이었다. 서울이 적치하에 있었던 90일 동안은 서울에 있었다. 따라서 이래저래 에피소드는 많다. 겨우 유엔군의 인천 상륙으로 서울이 수복되고 숨을 돌릴 새도 없이 다시 중공군의 참전하고 전선은 남하하였다. 이번에는 많은 사람들이 부산으로 대구로 피난하였다. 나도 예외는 아니였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동생을 데리고 우리는 처음 대구로 후에 부산으로 피난하였다. 몇개의 보따리를 꾸려서 트럭에 탔는데 대구까지는 2박 3일의 긴 여정이었다. 대구에서 1년을 버티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부산은 정부가 피난한 임시 수도였고 후방이었다. 대구에 비하여 안정감이 있는 도시였다.
나는 초량에 살았다. 재학중인 경기고교도 서대신동에 천막교사를 짓고 문을 열었다. 초량에서 대신동까지 때로는 전차를 타고, 때로는 도보로 통학하였다. 통학하는 길에 국제시장이 있었다. 국제시장은 피난 부산의 심장이었다. 많은 상품을 내놓고 사람은 북쩍였다. 많은 상품 가운데 지금까지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양키 장사"라고 불리던 미제 시장이다. 없는 것이 없었다. 전쟁으로 모든 생산이 중단되었던 시대라 미군 물자가 흘러나오지 않았으면 먹거리도 입을거리도 없었을 것이다.
군인에게 배급되는 레션 박스에는 가진 통조림과 치즈, 검과 초콜레트가 들어 있었고 양담배도 주요 물자 중의 하나였다. 이런 물자가 자연히 흘러나와 보통 사람들의 손으로 들어오곤 했다. 군복도 쏟아져 나왔다. 군복을 염색해서 입지 않으면 사람들은 옷을 조달할 수 없었다. 구두도 워커라는 목이 긴 군화를 모든 남자들이 신었고 허리를 졸아매는 유엔 잠퍼도 뺄 수 없는 입을 거리의 하나였다.
이런 상거래의 중심에 국제시장이 있었다. 삼팔선을 넘어왔던 이북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중심이었다. 남쪽 사람들에 비하여 천성적으로 생활력이 강했을까? 아니면 이미 남쪽에 피난민으로 넘어와서 서울의 남대문 시장 등에서 장사를 해 왔기 때문에 경험을 쌓은 까닭도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염색한 군복만을 입었던 것은 아니다. 부산의 명동이라 할 광복동에는 그때에도 사치를 즐기를 호사족들이 있었다. 새빨간 립스틱에 짙은 화장을 한 "양부인"들만이 아니었다. 조금 돈이 있는 여자들은 비싼 옷을 걸치고 다녔다. 대표적인 것이 비로드 치마다. 벨베트를 비로드라 불렀다. 그게 무슨 큰 호사일까? 그러나 그때는 그랬다. 내 친구 가운데 연설을 잘 해서 각종 웅변대회를 휩쓸던 친구가 있었다. 그는 어린아이가 빨아도 빨아도 나오지 않는 엄마의 젖꼭지를 물로 울며 죽어가는 비참함 모습을 그리다가 갑작이 광복동 거리의 비로드 치마를 입고 거리를 누비는 "시대를 망각한" 사치족을 맹렬히 규탄하였다.
이런 저런 모습이 생생하게 머리에 교차한다. 나는 그 시대의 증인이기 때문이다. 뒤늦게 "국제시장"을 관람하려 한다. 그 시대를 함께 한 같은 세대들이 좋았다고 해서다. 그 시대를 함께 하지 않았던 젊은이들이 "국제시장"을 어떻게 그렸을까? 지금부터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