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랜 햇수를 살고 인생의 말미에 서 있다. 때론 험하고 때론 난했으나 나의 인생은 ‘작은 자’의 천로역정이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고 그분을 사모하며 천국을 향하여 고비고비 걸어 가는 천로역정이었다. 주님은 작은 자를 사랑하셨고 작은 자는 천국을 사모하였다.
나는 전통적 유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전주 이씨, 큰 가문에 5대 종손이라는 숙명적 태생이 내 신분을 상징한다. 나는 만 세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아버지는 삼십삼 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셨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두 살 위셨으나 삼십오세에 청상 과부가 되신 것이다. 어머니는 열다섯 살에 혼인하여 서른두 살이 되도록 아이를 갖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머니가 모두의 기대가 절망으로 변해 가던 때, 기적 같이 첫 아이를 낳으셨다. 현대 의학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절에 불공도 드려서 겨우 아이를 낳으실 때 삼십이 세였으니 큰 집에 종부로 아이를 낳지 못한 십육년의 세월을 어떻게 견디셨을까. 차가운 시선과 스스로 죄책감에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세상에 태어났다.
나는 아버지의 기억이 없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어서 다음 해에 할아버지가 돌아 가셨는데 할아버지의 기억은 꽤 머리에 남아 있다. 아침마다 또래의 사촌 들과 절하여 문안을 드리면 언제나 할아버지는 유독 나를 칭찬하셨다. 일찍 아비를 잃은 손자가 얼마나 측은 하셨을까. 후에 생각해 보니 할아버지의 칭찬은 그분의 애잔함을 표하신 것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니 어린 내가 장손으로 상주가 되었다. 겨우 네 살 적 이야기다. 거친 베로 만든 상복을 입고 9일에 걸친 긴 장례를 치르던 생각은 생생하다. 사람들은 호곡하고 할아버지의 관이 꽃상여에 올라 집을 떠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전통적 유교 가정에서 어머니는 종부로 일 년에 열한 번의 제사를 채리셔야 했다. 지금처럼 난방이나 잘 되었었나? 엄동설한에도 마루에 앉아서 침척으로 높이를 재며 가진 굄새를 혼자 감당하여야 했다. 결국은 젊은 나이에 관절염에 걸리셨다. 환절기만 되면 일어나 걷지 못하는 어머니를 나는 방석에 앉힌 채 끌고 밀고 화장실에 오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제사는 오대를 모셨다. 고조 대까지를 오대라 하는데 모두 열한 번이었다. 고조 할아버지는 일찍이 상처하시고 후실을 두셔서 모두 세분이고 증조 할아버지도 젊어서 여러 번 상처하셔서 할머니가 모두 네 분이셨다.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의 제사를 받드니 일년에 열한 번이요 절기 마다 춘추로 절사라 해서 산소에 가서 지내는 제사는 따로 있었다. 외가도 유교 가정이고 어머니는 기독교에 접해 본 적이 없는 분이었다. 그러나 늘 내가 장성하면 교회에 나가고 유교적 질곡에서 벗어냐야 한다고 말씀하곤 했다. 어머니가 남의 가문에 와서 제례를 폐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기독교와 처음 접한 것은 6.25전쟁이 나고 대구로 피난했을 때였다. 중학교 이학년이었는데 대구에 내려 가니 계성중학교라는 기독교 학교에 배정이 되었다. 매일 채플이 있었고 나는 처음으로 예배가 어떤 것이고 성경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열심으로 믿은 것은 아니다. 그저 입문한 것이다. 대학 2년을 마치고 미국에 유학을 갔다. 그 때 로스앤젤레스에서 첫 여름을 지냈는데 친구들과 주일이면 교회에 갔다. 예배를 드리고 나면 밥과 김치를 먹을 수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좋았다. 지금은 타계하셨겠지만, 근래에 까지 유명하던 김동명 목사님이 이끄는 침례교회였다. LA에는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있었으나 친구들을 따라 침례교회에 나갔다. 예배가 끝나면 성경공부가 있었다. 그러나 가장 기다려지던 것은 사모님이 손수 준비하고 제공하셨던 식사시간이었다. 종이 울리고 하얀 쌀 밥에 불고기, 그리고 김치를 곁들인 식사는 늘 굶주리던 학생들에게 꿀 맛이 아닐 수 없었다. 목사님은 서둘러 내게 침례를 주고자 하였으나 나는 아직 믿음이 없는데 침례를 받는 게 아니라 여겨 사양하고 침례는 받지 않았다.
얘기를 하면 길지만 홀어머니가 돌연 세상을 떠나셔서 나는 학업을 중도 포기하고 귀국하였다. 그리고 아직 어린 나이에 아내 강정희 (권사)와 급히 결혼하였다. 아내는 기독교 신자였다. 유교적 전통이 강한 집안에 예수 믿는 종부가 들어온 것이다. 결국 우리 집의 전통을 통채로 뜯어 고치는 혁신을 감행한 것은 내가 아니라 아내의 몫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나를 경동교회에 인도하였다. 경동교회는 장충동에 있었는데 아내는 친정이 바로 이웃에 있었고 어려서부터 강원용 목사님을 따라다니는 소녀 가운데 하나였다. 결혼 후 나는 경동교회에 가서 강원용 목사님과 대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단번에 빨려 들듯이 그의 교인이 되고 만 것이다. 강 목사님은 겉 모습이 빼어났을 뿐 아니라 대단한 웅변이셨다. 말씀을 타고 났다. 그런데 내가 목사님을 좋아 했을 뿐 아니라 목사님도 또한 일찍이 나를 교회의 젊은 지도자로 점 찍으신 것이다. 세례를 받고 서른이 좀 넘자 집사가 되었다. 47세에 장로가 되어 미국에 오며 자원 은퇴할 때까지 십 팔년을 시무하였다. 65세에 나는 사업과 교회직에서 모두 은퇴하였다. 그리고 미국에 왔다. 미국은 내 젊은 시절의 꿈을 접었던 곳이다.
풀러턴에 집을 사서 정착하고 교회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얼마 동안 이곳 저곳을 다니며 살폈지만 결국 교단의 벽을 넘어 감리교인 남가주 주님의 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경동교회와 가장 비슷한 교회를 찾으려는 것이었지만 차츰 우리 교회가 보수의 바탕 위에 선 교회임을 알게 되었고 다행히 나도 점차 보수적 신앙을 존중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새벽 제단에 열심히 출석한 것도 주님의 교회에서이다. 나로서는 처음이다. 일찍 잠을 깨고 교회에 가는 것이 처음에는 큰 부담이었으나 지금은 매일 새벽이면 거의 습관처럼 교회로 향하는 것이다. 기도가 끝나면 교우들과 어울려 커피를 마신다. 몸이 쇠약해진 아내가 새벽 기도회에 출석하지 못하게 되자, 나는 집에 돌아 오면 다시 경건 시간을 갖는다. 노트한 내용을 바탕으로,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 대개 3, 40분은 걸린다. 교우들과의 코이노니아도 지금처럼 적극적이고 활발한 때가 없었다. 벽을 넘는 하늘의 교제가 내 목표이다. 남녀의 벽을, 그리고 노소의 벽을 넘고자 노력하였다. 홈페이지를 활발하게 드나들기도 한다. 소통과 교제, 코이노니아를 위해서다.
나는 천로역정의 말미에 서 있다. 내가 사는 여기가 그리고 지금이 하늘나라임을 굳게 믿으며 기쁘게 살고자 한다. 남가주 주님의 교회는 내가 하늘나라로 가는 천로역정의 길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