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切磋琢磨)]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성품을 천성(天性)이라 부른다. 선천적, 태생적 성격이라는 뜻의 천성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오랜 세월에 걸쳐 풍화(風化)가 진행하면 높은 산도 낮아지고 단단한 바위에 구멍도 생기지만 이런 풍화는 자연에만 한정된 게 아니다. 풍화는 우리의 성품과 인격도 변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성격의 변화를 풍화작용에 떠맡길 수는 있을까? 인간 스스로가 부단한 노력으로 갈고 닦으며 쪼고 갈아서 거친 것을 다듬어 아름답에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절차탁마(切磋琢磨)다. 이 사자성어는 논어(論語)의 학이편(學而篇)에서 유래한 것으로 “학문이나 덕행을 배우고 닦아서 옥을 다듬듯 빛을 내는 것” 이라 하였다. 타고난 천성이 거칠고 바르지 않더라도 절차탁마해서 바르게 하고 빛을 내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80을 바라보며, 내가 부모에게서 받았던 천성은 무엇이며 세월의 풍상(風霜) 속에 깎이고 다듬어진 성격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회상해 본다. 자랑보다 부끄러움이 많은 생애이지만 그래도 지금의 나는 옛날의 내가 아니다. 나는 세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리고 홀어머니 아래서 자랐다. 어머니는 엄격하고 단정한 성품의 여인이셨으나 아버지를 잃은 늦둥이 아들을 지극히 사랑하셨다. 우리 집은 이씨왕조의 종친이고 조선(祖先)이 높은 벼슬을 한 사대부의 집안이였다. 나는 그 대가(大家)의 6대 종손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열다섯에 시집 오셔서 서른 둘에 나를 나으셨다. 종부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17년의 세월 속에 집안의 어른들은 얼마나 걱정하셨으며 어머니는 얼마나 힘드셨을까? 병원에도 다니시고 절에도 다니셨다. 선바위라는 절에 드린 치성이 효력이 있어 늦둥이로 나를 잉태했다고 하셨다. 얼마나 큰 문중의 경사이고 그 가운데 태어난 나는 얼마나 지극한 관심과 사랑을 받았을까? 그러나 이런 환경은 나의 내면에 “교만”의 씨앗을 자라게 했을 것이다. 게다가 재주도 타고나서 좋은 학교에 입학하고 우등으로 졸업하였다. 칭찬은 따라다녔다. 성품에 겸손이 자리잡기에는 대단히 열악한 환경이었을지 모른다. 나는 오만한 아이였다.
아버지는 결핵으로 요절(夭折)하셨다. 환후가 깊어지자 집을 떠나 타처에 피접(避接)하셨다. 결핵은 난치의 전염병이었다. 공연하게 폐병임을 밝히지 않는 시대였다. 사람들은 아버지의 병이 늑막염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폐결핵이었고 피접은 격리가 목적이었다. 어린 나의 기억에 아버지가 조금도 기억되지 않은 것은 기억이 생성하기 전에 아버지가 집을 떠나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채 1년반이 되기 전에 할아버지도 세상을 뜨셨다.
아버지의 기억은 없지만 할아버지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아직 네살이 채 안된 어린 것이 망부(亡父)의 삼년상을 치른다. 거친 삼베로 만든 상복을 입고 상장을 짚은 세살짜리는 조석으로 아버지의 궤연에 섰다. 상식을 드리기 위해서 였다. 아아직 생존해 계신 할아버지께는 아침 문안을 드렸다. 사랑채에 좌정하신 할아버지께 큰 절을 드리면 할아버지는 아비 없는 장손이 측은하여 칭찬도 하시고 격려도 하셨다. 여러 또래 가운데 제일 의젓하다는 것이다. 그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시고 나는 겹상주가 되었다. 할아버지의 장례는 어린 마음에 깊이 새겨졌던 모양이다. 구슬픈 호곡 속에 구일장을 치른다. 꼬마 상주가 상복에 상장을 짚고 마지막 떠나는 상여의 뒤를 따르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우울한 아이였다. 어쩌면 슬픔이 몸과 마음에 배였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가리켜 어른스럽다고 하였으나 그것은 다만 어둡고 침울한 환경의 탓이었다. 우울, 그게 내 두번째 성품이다.
수줍기도 하였다. 쉽게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언제나 외톨이였다. 유치원에서는 아무 것도 따라하지 못하는 부족한 아이였다. 유치원에 들어가고 딱 한달은 나를 데리고 간 보모 할머니의 치마자락을 잡고 꼼짝하지 않는 부족한 아이였다. 노래도 유희도 하지 않았다. 노리터에서 아이들과 어울릴 줄도 몰랐다. 집에 오면 어머니가 물으신다. 오늘은 어땠느냐고? 보모 할머니가 그럭저럭 나를 감싸곤 했지만 어머니가 모르실 터가 없었다. 청상 과부로 아이에 대한 애착과 기대가 비할데 없던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나는 부끄럼 많고 소극적인 아이였다.
오만, 우울, 그리고 수줍음..이런 것들이 내 천성이라면 천성이었다. 태생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유년의 나는 늘 그랬다. 차차 철이 들면서 나는 이런 내 약점에 눈을 뜬다. 그리고 결심한다. 평생에 이를 극복하며 살아가겠다고. 오만 대신 겸손한 사람, 어둡고 우울한 대신 밝고 따뜻한 사람, 수줍은 사람 대신 당당한 성격을 개발하기 위하여 노력하리라. 젖먹은 힘을 다하여 이런 성격적 핸디캡을 극복하리라. 절차탁마하여 거칠고 모진 성품을 매끄럽고 아름답게 고치리라.
신앙과 종교는 절차탁마의 도구가 되었다. 나의 성품을 쪼고 갈고 다듬는 피나는 절차탁마의 도구였다. 급하고 격동하던 성품이 꽤 차분해 졌다. 타인에게 친절함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다. 베푸는 것이 베풀어 받는 것 보다 좋고, 섬기는 것이 섬김을 받는 것 보다 축복이라는 것도 차차 알고 익히게 되었다. 생각해 본다. 옛날의 나를, 그리고 지금의 나를. 나는 나로되 옛날의 내가 아닌 나를 대할 때 기쁘고 감사할 뿐이다. 벌써 인생의 종막은 내리고 있건만..
2015년 12월에
(재작년 2014년 봄에 썼던 글입니다. 새해를 맞이하며 다시 게시판에 올립니다)